추풍오장원(秋風五丈原)은 삼국지 북벌 중 가장 마지막 북벌을 의미하며, 제갈량 죽음을 담은 에피소드이다. 사실상 삼국지 결말에 해당하는 부분이다.
목차
1. 추풍오장원, 삼국지 북벌의 종착역
2. 추풍오장원의 결정적 네 장면 (전개)
3. 삼국지 연의 속 추풍오장원
추풍오장원, 삼국지 북벌의 종착역
제갈량이 위나라 장안을 점령하기 위해 감행하는 5차례의 삼국지 북벌 이야기는 삼국지연의 후반부의 가장 치열하면서도 재미있는 부분이다. 삼국지 북벌 전은 정사와 연의 모두 비중있게 다뤄지기 때문에, 여기서 읍참마속 등 다양한 고사들이 나오기도 한다.
그 중에서도 제갈량의 마지막 북벌을 의미하는 추풍오장원은 제갈량 죽음을 앞두고 이뤄져 삼국지의 실질적인 종장이다. 그렇기 때문에 각종 삼국지 콘텐츠들이 비중있게 다루는 부분이며, 중국과 일본 삼국지 덕후들은 추풍오장원에 다양한 문학적 수사로 표현하곤 한다 (星落 秋風五丈原, 秋風五丈原 天地を喰らう 등)
제갈량은 추풍오장원을 포함하여 총 5차례 북벌을 감행한다. 그 전까지의 삼국지 북벌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1차(기원후 228년) : 기산도를 통한 북벌, 마속의 가정 전투 패배로 철수 (읍참마속 유래)
2차(기원후 229년) : 진창도를 통한 북벌, 위나라 학소의 훌륭한 방어로 철수
3차(기원후 229년) : 무도와 음평을 점령. 사마의가 북벌전에 전면적으로 등장
4차(기원후 231년) : 기산도를 통한 북벌. 사마의 군을 대패시키나 군량문제로 철수
이전 4차례의 삼국지 북벌 전에서 일진일퇴의 공방전을 거듭하였으나, 성공에 이르지는 못했다. 이에 3년 간의 준비 끝에 기원후 234년 마지막 북벌인 추풍오장원이 전개된다. 당시 촉나라 북벌군의 규모는 10만에 달했으며 이는 5차례의 삼국지 북벌 중에 가장 규모가 컸다.
추풍오장원의 결정적 네 장면 (전개)
#1. 오장원에서 위나라와 대치하다
5차례의 삼국지 북벌 전에서 중요한 포인트는 공격을 나가는 촉나라 군사들이 1) 어느 루트를 통해 진격하며 2) 어디를 군사 거점으로 삼느냐이다. 북벌전이 전개되었던 한중-장안 일대는 진령산맥이라는 험준한 산맥이 위치해있어, 군사 이동은 물론 군량의 이동마저 쉽지 않기 때문에 진출로를 잘못 잡았다간 수성하는 측(위나라)에서 쉽게 저지할 수 있기 때문이다.
추풍오장원 전투에서 제갈량이 선택한 진출방향은 사곡도를 통한 오장원 진출로였다. 오장원은 뒤로는 진령산맥이, 앞으로는 위수라는 강이 있는 데다가, 지대가 평아보다 높은 지역이라 쉽게 요새화가 가능하다는 장점이 있었다.
제갈량의 입장에서는 앞선 4차례의 북벌 당시 늘 보급문제를 겪었기 때문에 안정적인 베이스캠프를 구축하는 것이 중요했다. 오장원은 지리적 이점을 가지면서도 보급기지가 될 한중과의 거리고 가까웠기 때문에 마지막 북벌의 전진기지가 되었다.
#2. 제갈량의 승부수와 곽회의 수성
오장원 앞에서 제갈량의 촉나라와 사마의의 위나라 군사들은 탐색전을 벌이던 도중, 제갈량이 기습적인 승부수를 던진다. 바로 장안성의 반대방향에 위치한 북원을 공격하는 것이다. 최종 목적은 북원을 거쳐 가정까지 점령하는 것이었다. 가정은 1차 북벌당시 마속의 실책으로 촉나라가 대패했던 지역으로, 서북부 지역(양주, 옹주)으로 진출하는 교두보이다. 제갈량은 먼저 가정을 점령하여, 위나라의 서북부 지역으로의 진출을 막고 이 지역의 지배권을 빼았을 속셈이었다.
위나라 장수들은 제갈량이 장안 방향으로 진격을 할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이 승부수는 성공할 뻔 했으나, 위나라 장수 곽회가 제갈량의 의도를 간파했다. 이에 사마의에게 건의하여 북원으로 병력을 급파하였고, 아슬아슬하게 촉나라를 막아냈다.
그러자 제갈량은 이번에는 동쪽의 북원으로 진격하는 척을 하다가 강을 건너 서쪽으로 사마의 군을 우회하여 양수를 공격하려는 전략을 짠다. 양수를 점령하기만 한다면 바로 장안성을 공격할 수 있기 때문에 제갈량 입장에선 추풍오장원 전투를 빨리 끝낼 수 있는 비책이었다.
그러나 이번에도 곽회가 제갈량의 계책을 간파한다. 곽회의 적절한 대응으로 위나라는 양수를 지켜낸다. 결국 제갈량은 전투를 단기에 끝낼 수 있는 기회를 놓치고 장기전을 준비하게 되었다. 이 때문에 추풍오장원 전투에서 사마의보다 곽회의 공을 높게 평가하는 이들도 적지 않다.
#3. 장기전의 지속과 사마의의 위기
위나라 사마의의 전략은 이전과 마찬가지로 촉나라와 응전하지 않으며 수성만 하여 촉나라 군이 스스로 지쳐 퇴각하게끔하도록 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촉나라는 오장원에 진지를 구축하고 장기전에 대비한다. 이전의 북벌에서 군량문제로 고생했던 것과는 달리 이번에는 오장원에서 직접 식량을 경작하면서(둔전 실시), 효과적으로 장기전에 대비한다. 게다가 4차 북벌이후 3년간 착실히 북벌준비를 했기 때문에 사마의의 장기전을 유도하는 계략은 위기에 봉착한다.
아니나 다를까 위나라 군부에서는 촉나라의 안정적인 대처에 동요하며, 장기전을 고집하는 사마의에 대한 불만이 터져나오기 시작했다. 무엇보다 위나라의 군 규모가 촉나라에 비해 부족한 것도 아니었기에 공을 세워야 하는 위나라 장수들은 진출을 강력하게 희망했다.
촉나라와 붙어보기도 전에 내부로부터 정치적 위기에 봉착한 사마의는 황제 조예의 승인이 있어야만 진출이 가능하다며 끝까지 버틴다. 조예는 사마의의 전략을 지지하고 있었기 때문에, 황제의 힘을 등에 엎은 사마의는 군부의 불만에도 불구하고 장기전을 밀고 나간다.
#4. 죽은 공명이 산 중달을 내쫓다
결국 사마의의 전략이 효과가 나기 시작한다. 촉나라가 아무리 장기전을 착실히 준비했다고 하더라도, 위나라의 홈인 장안 지역에서 장기전은 공격하는 입장에서는 여러모로 부담이 되었다. 특수상황인 전쟁의 장기화는 여러모로 국력을 소모시킨다. 멀리 볼 것도 없이 한국전쟁 당시 황폐화 되었던 상황을 떠올리면 이해하기 쉽다.
게다가 촉나라의 북벌에 결정적인 문제가 발생하였는데, 바로 '제갈량의 죽음'이었다. 제갈량은 노령의 나이에 총사령관으로써 과도한 업무를 맡고 있었다. 기록에는 제갈량이 거의 먹지도 잠을 자지도 않으면서 전쟁에 공을 들였다고 한다. 결국 지속된 장기전에 형세가 어려워지자 제갈량은 근심과 분노로 피를 토하다가 죽음에 이르렀다.
제갈량을 잃은 촉나라는 퇴각을 실시하고, 이 소식을 들은 위나라는 이제서야 추격을 시작한다. 이 때 촉나라의 장수 강유는 북을 울리며 군대의 깃발을 반대로 하여, 마치 제갈량 죽음이 위나라 군을 끌어내기 위한 계책이었던 것처럼 위장 전술을 지시한다.
촉나라의 계략에 속은 위나라 군은 섣불리 추격을 하지 못하고, 결국 촉나라 군은 안전하게 퇴각을 할 수 있었다. 이 때 유명한 '죽은 공명(제갈량)이 산 중달(사마의)를 쫓았다'라는 말이 민간에서 나오게 되었다.
삼국지 연의 속 추풍오장원
한 가지 흥미로운 점은 삼국지연의에서는 추풍오장원 전투(제 5차 북벌)에서 '추풍오장원'이라는 표현이 등장하지 않는 다는 점이다. 삼국지 연의에서 제갈량 죽음을 묘사할 때 '큰 별이 떨어지며 한나라 승상은 하늘로 돌아가고, 위나라 도독은 나무 인형을 보고 간담이 서늘해진다(隕大星漢丞相歸天 見木像魏都督喪膽)'라는 표현이 등장하기는 하지만 정확히 '추풍오장원'이 등장하지는 않는다
오히려 추풍오장원은 제갈량이 처음 등장하는 장면에서 나온다. 유비의 삼고초려 끝에 촉나라 군에 합류하기로 결심한 제갈량은 동생에게 삼국통일을 이루고 다시 돌아오겠다고 얘기하고 연의에서는 이 장면을 시로 묘사하는데, 시의 문구 중에 '추풍오장원'이 등장한다. 시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後人有詩歎曰 (후인유시탄왈)
후대의 사람이 시를 지어 이를 기렸다
身未升騰思退步 (신미승등사퇴보)
아직 출세하기 전인데 돌아올 것을 생각하니
功成應憶去時言 (공성응억거시언)
뜻을 이뤘으면(성공을 했으면) 그때의 말을 잊지 않았을 것이다
只因先主丁寧後 (지인선주정녕후)
다만 선주(유비)가 간절히 부탁한 후였기 때문에
星落秋風五丈原 (성낙추풍오장원)
별은 지고 가을 바람 부는 오장원
삼국지연의는 삼국 시대 이후 사람인 나관중이 쓴 소설이었기에 애초에 제갈량 죽음을 염두해두고, 복선같은 의미로 해당 시를 삽입하였다고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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