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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3대 악녀 소개

중국 3대 약녀는 중국 역사에서 나라를 위기로 몰고갈 정도로 권력을 휘둘렀던 3명의 악녀를 말한다. 중국 3대 악녀의 맴버로는 한나라 초대 황제 유방의 부인인 여태후(여치), 중국 역사상 유일한 여황제인 측천무후, 청나라 말기 3대에 걸쳐 권력을 휘둘렀던 서태후를 말한다.

 

여태후(여치)

 

여태후는 한나라 초대 황제인 유방의 아내로, 중국 역사에서 기록으로 남은 최초의 황후이다. 본명은 여치이다. 악녀로써의 여치가 우리에게 친숙하지 않은 이유는 유방이 통일전쟁을 하던 초한지 시기에는 그녀의 행적이 드러나지 않기 때문이다. 

 

오히려 초기에는 여태후의 여장부적인 면모가 부각된다. 애초에 여태후는 부유한 집안의 자제였으나 아버지인 여공이 건달이었던 유방의 비범함을 보고 억지로 여태후를 시집을 보냈다. 유방이 변변치 않았던 건달 시절에 사고를 치면 여태후가 대신 옥살이를 하기도 했고, 초나라와의 전쟁에서 패해 포로로 항우에게 붙잡혀 있기도 했다. 이 시기의 여태후는 '악녀'라기 보다는 '내조의 여왕'에 가까웠다

 

여태후의 악행은 한나라의 통일 이후에 부각되었다. 중국을 통일한 유방은 여태후의 아들인 유영(혜제)을 폐위시키고, 측실인 척부인의 아들 유여의를 태자로 세우려고 했다. 물론 대신들의 반대로 폐위까지는 가지 않았지만 이때의 위기감이 여태후를 악녀로 만드는 흑화의 시작이었다.

 

유방이 죽고 유영이 황제에 즉위하자, 여태후는 척부인의 손과 다리를 자르고 눈을 뽑은 뒤에, 독약을 먹여 귀를 멀게한 뒤에 돼지우리에 가뒀다. 척부인을 숙청한 것도 모자라 척부인의 아들 유여의에게 약을 먹여 죽음에 이르게 했다. 역사서에서 서술한 것만 이정도이고, 야사에서 묘사된 악행들은 훨씬 잔인하다

 

측천무후 (무소의)

 

측천무후는 당나라의 개국공신인 무사확의 차녀로 본명은 무소의이다. 당 태종의 후궁으로 입궁하였는데 처음에는 태종이 총애했는지 본명보다는 '무씨 성을 가진 예쁜이'라는 의미의 '무미랑'으로 불렸다. 하지만 높은 품계까지 오르지는 못하였고, 결국 태종이 사망하자 황실의 관습에 따라 출가하여 비구니가 되었다

 

그런데 태종의 아들인 고조의 눈에 들어 다시 후궁으로 입궁하게 된다. 아버지의 여자를 후궁으로 들이는 것이었기 때문에 많은 대신들이 반대했지만, 당시 측천무후의 관직이 높지 않았기 때문에 당 태종은 혼인을 강행하였다.

 

당시 고종의 부인인 황후 왕씨(왕황후)와 후궁인 숙비 소씨(소숙비) 사이에 권력다툼이 있었다. 왕황후는 소숙비를 숙청하기 위해 측천무후에게 접근하였는데, 측천무후는 오히려 왕황후와 소숙비를 모두 제거한 뒤에 본인이 황후에 자리에 올랐다. 그리고 자신의 황후 등극에 방해했던 공신들을 모두 숙청하였다.

 

태종이 죽은 뒤, 측천무후는 자신의 아들인 중종을 대신하여 수렴청정을 하며 권력을 휘둘렀다. 측천무후의 권력이 강해지는 것을 우려하여 많은 대신들이 반발하였으나, 반대파들을 착실히 숙청하며 권력을 강화하였다. 결국 690년 측천무후는 자신의 아들로부터 왕위를 물려받아 중국 역사상 유일한 황제가 되었다.

 

측천무후가 악녀의 대명사가 된 이유로는 여러가지가 있다. 야사에 따르면 본인의 권력을 위해 아들이나 딸까지 매정하게 죽이는 악행을 저지르는데, 역사적으로 명확히 밝혀진 바는 없다. 그렇지만 본인의 권력을 위해 철저하게 반대파를 숙청하고 매정한 공포정치를 실시한 것은 사실이며, 종국에는 반대파의 압박에 의해 황제의 자리에서 쫓겨났기 때문에 더욱 부정적으로 평가되었다.

 

서태후

 

서태후는 청나라 말기 3대에 걸쳐 권력을 휘두른 황태후로 9대 황제 함풍제의 후궁이자, 10대 황제 동치제의 어머니, 11대 황제 광서제의 큰어머니였다.

 

서태후는 9대 황제 함풍제의 후궁으로 입궁하였으나, 함풍제의 유일한 아들이었던 동치제의 생모였기 때문에 황후의 지위에 준하는 귀비가 된다. 함풍제가 죽고, 동치제가 황제가 되자 서태후는 수렴청정을 하며 본격적인 권력을 휘두르게 된다. 

 

수렴청정 기간에는 군대를 강화하고 신진 인재를 등용하는 등 정치를 잘 하였으나, 동치제가 성인이 되어 직접 정치를 하려고 하면서부터 모자간의 갈등이 심해졌다. 그러는 와중에 동치제가 19세의 나이로 요절하였는데, 일설에서는 서태후가 권력을 장악하기 위해 아들을 살해했다는 이야기도 전해진다.

 

서태후는 본인의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 여동생의 아들인 재첨을 양자로 들어 왕위에 앉치는데, 이 사람이 11대 황제인 광서제이다. 광서제가 즉위했을 당시에도 4살에 불과하였기 때문에 서태후가 다시 수렴청정을 하였다. 광서제 시기에는 본격적으로 열강이 청나라를 침공하여 국력이 쇠하고 있는 상황이었다.

 

그럼에도 서태후는 본인의 권력 유지에만 골몰하였다. 1908년 광서제는 누군가가 보낸 독약을 먹고 요절하였는데, 여기에도 서태후가 관여했다는 설이 강력하다. 

 

서태후는 유언이 자신처럼 여자가 정치하는 일이 없도록 하라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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