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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태후의 젊은 및 어린시절 사진들을 소개합니다. 서태후 젊었을때 막 카메라가 보급되던 시기라 사진이 그렇게 많지는 않습니다. 그래서 서태후 사진이라고 검색하면 대부분 노년 사진이 나옵니다. 그래서 사진을 찾는 데 애를 좀 먹었지만 중국어로 서칭해서 찾은 사진들을 소개합니다.

 

서태후-젊었을때-황제와-찍은-사진
서태후-젊었을때

 

서태후의 어린시절

서태후(西太后)라는 명칭은 자금성 서쪽에 위치한 태후라는 의미로, 서태후의 처소가 서쪽에 있었기 때문에 붙은 별칭이다. 이름에서 짐작할 수 있듯이 동태후(西太后)라는 태후가 따로 있었는데, 서태후의 라이벌이라고 할 수 있는 인물이었다. 한편 서태후는 자희태후(慈禧太后)라고도 불리며, 중국에서는 자희라는 명칭이 더 통용되고 있다.

 

서태후의 어린시절과 관련하여 재미있는 일화가 있습니다. 서태후가 궁궐에 처음 입성했을 때는 동태후가 직책이 더 높았을 뿐만 아니라 황제인 함풍제의 사랑을 더 받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젊은 서태후는 어떻게든 함풍제의 눈에 띄기 위해 온갖 노력을 하였고, 결국 함풍제(咸豊帝)의 장남인 동치제(同治帝)를 낳으며 귀비의 자리에 오르게 됩니다. 

 

하지만 동치제는 엄격한 친어머니였던 서태후보다 양어머니 동태후를 더 믿고 따랐으며, 이는 서태후의 심기를 건드렸습니다. 그래서 그녀는 아들 동치제와 며느리의 사이를 이간질 하였으며, 동치제가 방탕한 생활을 하도록 방조하였습니다. 결국 동치제는 성병에 걸려 19세의 나이에 요절하였고, 이에 서태후는 자신의 4살짜리 조카 채점을 양자로 맞아 광서제(光緒帝)로 즉위시킵니다. 

 

이러한 일화는 서태후가 젊었을때부터 얼마나 권력욕이 강했는지를 보여주는 일화입니다. 

 

서태후-어린시절-사진
서태후-어린시절-사진

 

서태후와 중국의 3대 악녀

서태후는 흔히 청나라 몰락의 원흉으로 일컬어집니다. 서태후의 평가가 안좋은 이유는 크게 2가지 이유가 있습니다. 하나는 앞서 소개하였듯이 자신의 출세를 위해 친아들의 죽음을 방조할 정도로 냉혹했기 때문이고, 다른 하나는 청나라가 외세에게 주권을 뺏기는 위기 상황에서도 자신의 안위만을 돌보는 정치를 했기 때문입니다.

 

서태후는 광서제를 대신하여 섭정을 하였습니다. 이 섭정 시기에 서태후의 실정은 극에 달했다고 전해집니다. 대표적인 게 이화원 건설로, 서태후는 황실의 정원인 이화원을 짓는데 청나라 1년 예산의 30%를 사용했다고 합니다. 뿐만 아니라 의복이나 연회 등에 사치를 일삼았을 뿐만 아니라 남성편력 또한 매우 심했던 것으로 알려져 잇습니다. .

 

그래서 중국인들 사이에서 서태후의 이미지는 최악에 가깝습니다. 특히 자국 역사에 자부심이 유달리 강한 중국인들에게 서태후 시기는 청일전쟁 패배, 의화단 운동 등 가장 치욕스런 역사이기 때문에 중국의 3대 악녀라고 평가 받고 있습니다. 일반적으로 중국의 3대 악녀는 여태후, 측천무후, 서태후로 불립니다. 중국의 3대 악녀에 대해서는 아래 포스팅을 참고 바랍니다.

 

 

중국 3대 악녀, 그녀들의 악행은?

중국 3대 악녀 소개 중국 3대 약녀는 중국 역사에서 나라를 위기로 몰고갈 정도로 권력을 휘둘렀던 3명의 악녀를 말한다. 중국 3대 악녀의 맴버로는 한나라 초대 황제 유방의 부인인 여태후(여치)

china-pedia.tistory.com

 

서태후 젊었을때 사진 

아래는 서태후의 젊었을 때 사진 모음입니다. 

서태후-어린시절-사진
서태후-어린시절
서태후-젊었을때-정면으로-찍은-사진
서태후-젊었을때-사진
서태후-젊은시절-정면으로-찍은-사진
서태후-젊은시절

 


지금까지 서태후의 어린 및 젊은시절 사진과 일화에 대해 소개하였습니다. 서태후에 대해 자세히 알고 싶다면 아래 영상과 포스팅을 참고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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